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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상담사에게 공감을 받아 치료를 경험하는 내담자가 그 방을 나가서도 치료의 효과를 경험할 수 있을까?

이 글은 Don S. Browning의 Atonement And Psychotherapy에 나온 글을 발췌한 것을 편집한 것이다.

상담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작고 밀폐 된 개인적인 공간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떻게 그 조그마한 공간에서 한 상담사에게 공감을 받아 치료를 경험하는 내담자가 그 방을 나가서도 치료의 효과를 경험할 수 있을까? 한 사람에게 받은 공감이 어떤 이유에서 이 세상에서 공감 받은 느낌을 주며 상담실 밖에서까지 효과를 가질까?

 

Browning은 Karl Rogers의 생각에서 대부분의 세속적 치료에는 존재론적인 수용이 추정으로 숨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세속적 치료라고 불리는 치료에도 드러나지 않은 가정이 있을 수 있다. 의식적으로 인정하건 아니건 간에 이 가정이 없이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그 가정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신학적이고 기능에 있어서는 교회적인 전제가 있을 수도 있다. 내담자가 경험하는 수용은 치료사의 수용을 목격하는 치료상황을 초월한 존재의 수용에 근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속적이라고 하는 치료는 이름만큼 세속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공감적 수용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면 치료사가 단순하게 내담자를 수용한 것 이상을 의미한다. 치료상황에서 프로이드는 치료사가 어떻게 가끔 가족의 구성원을 대표 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Jerome Frank는 치료사의 역할이 이 사회를 대표하는 승인된 전문가라는 부분에 치료능력의 원인이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치료사의 수용은 대표적인 수용이다. 그의 수용에서 내담자는 더 큰 맥락의 공감적 수용을 경험한다. 큰 맥락의 수용은 부모와 커뮤니티등의 사회적 환경을 포함한다. 이 수용은 효과적인 사회적 수용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사회적 수용이 현실 속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수용은 사회를 포함하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한다. 결국 치료사의 수용은 내담자가 치료사를 넘어 모든 유한한 대상을 초월하는 어떤 구조, 우주와 우주를 유지시키는 그 어떤 힘에게 까지 진정으로 수용 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주장하고 목격하는 것이다.

 

내담자의 입장에서도 치료사에게만 수용을 받은 느낌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수용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만약 이 의미를 치료 상황에서 내담자가 이해하지 못하다면 밀폐된 작은 치료공간을 넘어 치료의 열매가 어떤 일반화된 결과를 줄 수 있을 지 의문이 든다. 성공적인 치료는 내담자가 치료사와 함께 하는 경험이 일반화 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치료사가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그가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Rogers는 내담자를 대할 때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치료사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했다. 만약 모든 사람이 내재된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다면 이 태도는 존재론적인 근거로서 지지받아야 한다. 이 진술은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이 다른 누군가의 기호와 선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유한한 태도를 초월하는 생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가지는 모든 의미, 가치, 중요성이 궁극적으로 기준이 되는 존재론적 원리나 실체로 우리를 설득한다.

 

신학자들도 신학에서 작용하고 있는 더 큰 존재론적인 수용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렸다. Daniel Day Williams, Wayne Oates, William Hulme는 목회상담을 크게 염두하고 큰 수용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Don Browning과 Thomas Oden은 서로 만나기 전에 독립적으로 거의 동시에 세속적인 치료에도 큰 존재론적인 수용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Oden은 Rogers와 Barth의 대화 맥락 안에서 Barth의 그리스도론적인 문구인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Deus pro nobis)’의 측면에서 더 큰 존재론적인 수용을 봤다. 물론 기독교 신학의 맥락에서는 존재론적 수용에 대해 Oden과 William가 한 것처럼 그리스도론적인 표현을 제공하는 것이 전적으로 적절하다. 실제로 Oates는 이렇게 했다. 그가 더 큰 수용과 연관 지은 성령의 역사는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적인 해석이다.

 

그렇다면 추가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치료사의 수용과 더 큰 수용 사이에 가정하는 유비 관계가 있을까? 둘 사이에서 어느 방향으로 작용할까? 작은 것과 큰 것 중 어떤 것이 기준이 될까? 치료사의 수용이 신학적인 진술의 자료가 될 수 있을까?
Don Browning은 다음의 제의가 위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시도를 한다고 한다.

1. 치료사의 수용과 큰 수용 사이에는 유비관계가 있다. “유비관계”는 전통적으로 토파스학파의 문헌 용어로 두 수용이 양과 완벽함의 정도에 대해 서로 다를지라도 유사한 본질이 있을 수 도 있다는 비례성을 나타낸다. 치료사의 공감적 수용은 더 큰 수용에 대해 유비적이고 비례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수용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거나, 상징하거나, 증거 할 수 없다.

 

2. 상담장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더 큰 수용은 작은 수용의 추정, 기준, 근거이며 작은 기준의 가능성이 된다. 다른 말로 치료사가 내담자를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내담자가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전 경험에 근거한다. 작은 것을 경험한 것에 근거해서 더 큰 것 생각을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치료자와 내담자를 초월한 무언가에 수용될 수 있다는 선험적인 직관에 근거해서 우리는 내담자를 수용하는 것을 상상한다. 이 말을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치료사가 내담자를 수용하는 가능성은 내담자가 실제로 존재적으로 수용되었던 이전 혹은 선험적인 근거에 있다. 이 근거는 내담자가 실제 존재론적으로 수용 받았던 참조를 내포한다. 우리는 작은 경험을 이용해서 큰 경험을 추론할 수 없다. 오히려 상담자와 내담자를 초월하는 무언가에 수용될 수 있는 앞선 직감 때문에 내담자를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담자를 수용 가능성은 내담자가 수용 받았다는 실체에 근거한다.

 

신학 맥락 안의 비유 사고는 말하자면 아래서 위의 방향(귀납적) 대신에 항상 위에서 아래의 방향으로(연역적)이라는 사실이 Charles Hartshorne과 Karl Barth과 같은 폭넓은 사상가에 의해서 비슷하게 공유된 통찰이다. 두 신학자는 이 통찰이 단순히 유한함의 조각을 신에게 유비적이고 상징적으로 적용하는 절차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다.

 

Bart는 인간 아버지됨의 최선에 상상적인 확장을 해서 신의 아버지됨의 개념에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신의 아버지됨이 먼저 드러났기 때문에 인간 아버지됨의 최선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했다. Hartshorne은 유한한 존재에 대해서 어떤 술부도 문자적으로 사실일 수 없으며 유한한 존재에 적용되는 진술은 오직 상징적으로만 참이라고 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문자적으로 참인 진술의 주어가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랑을 하신다.” 유한한 인간은 절대로 완전하게, 완벽하게, 분명하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사랑한다. 모든 유한한 피조물은 부분적으로 혹은 불완전하게 알며 그러한 이유로 문자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Hartshorne과 Bart는 모든 유한한 선함은 알려졌고 이름을 지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전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적” 혹은 “초탈적” 직면과 그 선함의 완벽한 사례 때문이라고 동의한다. 이들의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에 있는 적법한 방법론적 절차를 이해하기 위한 이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둘은 안셀름학파라는 공통배경을 가진다. 이들의 견해에 차이점이 있지만 심리학과 신학의 대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둘의 입장을 합성한 맥락에서 가장 잘 진행된다고 하겠다. Bart의 그리스도론적 강조는 Hartshorne의 해석으로 균형이 잡힐 필요가 있다. Hartshorne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일반 존재론적 관계를 이야기 한다. Hartshorne의 존재론도 죄와 죄가 사람이 선함을 인식과 아는 능력에 끼친 영향에 대한 기독교 해석에 의해서 균형잡힐 필요가 있다. 이 진술이 우리를 아래의 3번째 제의로 인도한다.

 

3. 선함에 대한 유한한 판단에 의해 가정된 완벽함의 선험적 표준은 Bart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론적으로 드러났고 Hartshorne이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론적으로 나타났다. Bart는 완벽함의 선험적 표준이 그리스도에게서 지극히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리스도에게서 지극히 드러났지만 하나님이 창조와 섭리의 자연절차에서 세상과 일반적으로 관계를 하고 있다고 기독교인은 단언할 수 있다. 이 일반적인 관계는 이 세상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완벽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에 의해 예수에게서 드러났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세상의 모든 실제적인 자연절차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존재근거인 하나님에 대해 사람들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물을 수 있다. 본질적으로 유비는 양방향으로 작용한다. 이 점이 Hartshorne이 Bart보다 더 나간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함의 선험적인 시사를 가지고 유한한 선함의 분석으로 이동할 수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 완벽함의 실제적인 내용은 유한한 선함의 구조를 분석하고 일반화해서 획득될 수 있다. Browning은 신학과 정신치료 심리학의 대화에 유사한 절차를 제안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완벽함의 계시에서 시작해서 이 계시가 더 작은 선함으로 인도하게끔 한다. 그리고 나서 과학의 도움으로 작은 선함의 구조를 분석한다. 분석 결과를 예수 그리스도에서 드러난 궁극적 선함의 기준에 대한 이해를 더 선명하게 하는데 사용한다.

 

  • 유비절차를 이해하기 위한 이상적인 상황 만들기

우리가 어떤 두 대상을 비교하여 유비적인 관계를 보여주고자 한다면 두 대상을 비교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두 대상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수용과 유한한 인간의 무조건적인 공감적 수용의 유비관계를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Browning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향을 제시한다. 기독교인은 예수안의 궁극적 비유인 큰 완벽함의 기준에 태도를 맞춰서 이 세상에서 작고,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큰 구조의 사례를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후에 작은 사례들의 분석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묘사 가능한 유비가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리고 예수에서 드러난 크고, 신화적인 유비에 명료함을 가져오는데 사용될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1) 치료적 상황에서 필요하고 필수적인 요소를 들어내다.
2) 이 요소에서 유한성과 죄악을 제거한다.
3) 요소를 확신하는 대표적인 맥락이나 수단-목표 맥락에 설정한다.

 

  • 유비 절차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도구가 필요할까?

유비적 절차의 본질이 어떻게 설명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틀이 먼저 제시되어야 한다.

 

Browning은 다음과 같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관계는 무엇일까?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인식론적 질문을 던진다. 상징의 현실에 대한 관계는 무엇일까? Browning은 상징과 현실 사이에는 참여관계가 있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도 참여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질문은 참여 혹은 Dorothy Emmet이 “라포”라고 부르는 것의 개념으로 수렴한다.

 

Emmet은 과학론의 차원에서 “현실” 혹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개념을 유지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인식론적 입장을 발달시켰다. Dorothy Emmet의 존재론-인식론적인 틀은 Alfred N. Whitehead의 철학을 재해석해서 단순하게 만든 것이다. Hartshorne도 Whitehead학파이기 때문에 지금 다루는 내용은 Heartshorne의 유비개념 너머 있는 존재론에 대해 통찰을 줄 것이다. 또한 유비적 사고가 어떻게 두 방향으로 진행되는지 이해하도록 도움을 준다. 추가적으로 우리가 공감의 인식론을 발달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Emmet은 두 종류의 인지방식을 구분한다. 하나는 부사적(adverbial)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목격격 혹은 대격(accusative) 방식이다.

 

부사적 방식은 “한 경험 상태에 자격을 주는 필수 불가결한 감정”이다. 물리적 환경에서 오는 에너지 자극에 대한 생리적 반응을 의미한다. 이 반응은 환경으로부터 우리에게 전달되는 에너지 절차의 주관적 형태를 구성하는 정서적인 분위기, 몸의 느낌을 만든다.

 

대격방식의 인지는 부사적방식의 정서적 반응에서 어떤 단순해진 상징적 형태를 추상화하고 구별한다. 그리고 결국 이 형태를 외부 환경에 투사한다. 대격모드의 인지는 부사적 모드 에서 예외 없이 만들어지는 추론이다.

 

두 인지방식의 이해의 바탕이 Emmet의 라포에 대한 개념이다. Emmet의 라포 개념은 주장하기 위해서 찾고, “둘러싼 세상의 기능과 활동과 함께하는 우리의 기능과 활동의 기본적인 지속성”을 나타낸다. 부사적인 차원의 인지에서 세상과 우리 사이의 기능의 지속성은 패턴이 있는 특징으로 느껴진다. 부사적 인지는 전체론적 반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반응은 유기체를 이용하는 패턴절차가 있는 정체성이나 관련성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에너지 활동을 분명하게 재생산하지 않는다. 몇 가지 선택적인 활동이 이 차원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대격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비록 대격방식의 인지가 더 전체론적인 부사적 방식의 인지에서 추상화되었지만 여전히 유기체의 반응과 이 반응이 최소한 부분적으로 일치하거나 부합되는 에너지 패턴에 참여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상징 프로세스의 이후와 더 정제된 차원에서만 상징이 임의적으로 되고 이 상징이 상징하는 절차에 아무런 참여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외부세계의 사건이 최소한 부분적으로 부사적인 반응을 만드는 한에 있어서 그 사건은 우리의 경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다. 사건을 상징한다는 것은 우리 경험 안에 있는 것을 근거로 우리의 경험을 상징하는 것을 의미한다. Emmet은 이 과정을 “유비적” 프로세스라고 불렀다. 그녀는 모든 인지 활동이 사건들 내부의 상호관계와 이 사건들에 대한 우리 반응의 초월적인 측면에 투사하는 절차를 포함하기 때문에 상징 프로세스는 필수적으로 유비 프로세스라고 제안한다.

 

유비의 방법론은 최소한 사건의 질적인 패턴과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 사이에 부분적으로 유사구조가  있다는 가정위에 기초한다. 게다가 유비의 방법론은 라포와 부사적 반응, 존재론과 구원론의 개념이 만나는 것에 기초한다. 유비는 현실이 나타내는 것에 참여한다.

 

Emmet의 유비적 사고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생각과 어떻게 일치될까? 첫 번째, 인간이 하나님의 완벽함에 대한 선험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사적인 차원일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첫 직관이 경험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추론도 앞선다는 면에서 선험적이다. 이 직관은 추론의 결과가 아니다. 주어진 것이다. 반면에 이 선험적인 경험에 대한 우리의 상징은 추론적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과 수용이 최소한 부분적으로 대인 비유에 의존해서 모든 대인활동에서의 수용, 하나님의 수용에 대한 우리의 상징을 앞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수용이 인지의 부사적 방식에서 선험적 경험이다. 그렇지만 이 관계의 오직 한 용어만이 경험안에 있다. 우리는 이 수용의 관계를 이 관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부사적 방식에서만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완벽한 수용의 선험적 사실을 상징하려면 대인의 유비에 관해서 해야 한다. 대인의 유비는 인간 경험 내의 모든 것이다.


 
치료적 수용은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 해석적인 유비를 제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치료사이고 치료사의 입장에서 치료적 수용에 대해 무언가를 상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담자이고 치료적 수용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치료적 수용에 대한 무언가를 상징할 수 있을 것이다. 치료적 수용의 경험에 대한 모든 측면은 누군가의 경험에 들어있다. 치료적 수용의 경험에 대한 모든 측면은 누군가에 의해서 관찰되고 분석될 수 있다. 모든 관점은 모아질 수 있고 명료한 유비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유비가 하나님의수용의 선험적 경험에 대한 구체적인 특성을 명료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Posted by SuperFineT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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